작열하는 태양 입에 물고 해녀 숨비소리 들으며 피어난 꽃

[주말엔 꽃] 순비기꽃

바닷가 검은 바위 위에서 연한 보랏빛 꽃이 소박한 자태를 발한다. 파도와 바람이 바닷물을 몰고 오면 뒤집어 써야 할 텐데, 줄기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 제 자리를 넓히고 있다.


▲ 해안가에 자라는 순비기나무(사진=장태욱)

남원읍 위미리 밍금애 해안을 지나다 활짝 핀 순비기꽃을 보았다. 예전에 영화 ‘건축학개론’을 촬영했던 해안가에서 조금 서쪽인데,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확 트여 있다. 주변은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고 가끔 산책하는 사람들이 지나기는 하는데, 지금은 여름이라 나그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근처에 조그마한 갤러리가 있다. 옛 초가를 재활용해서 갤러리로 쓰고 있다는데, 궁금해 들여다봤지만 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발길이 뜸하니, 해안가에 염생식물이 살판이 났다. 만조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조간대에 푸른갯골풀이 드넓게 군락을 이루고, 군데군데 함초가 자리를 넓히고 있다. 그리고 파도가 닿을까 말까하는 해안가에 순비기나무가 여름 햇살 아래서 자신을 뽐내고 있다.


▲ 순비기꽃(사진=장태욱)

순비기꽃은 초록 잎사귀 사이로 꽃대를 올리고 거기에 올망졸망 꽃망울을 매단다. 꽃망울이 자라는 동안 컵 모양을 한 꽃받침이 꽃망울을 붙잡아 준다. 꽃망울이 자라면 나팔꽃처럼 다소 길쭉한 꽃봉오리가 된다. 꽃봉오리가 끝에서 오므리던 꽃잎이 펼치면 그 안쪽이 보랏빛을 드러낸다. 수술을 네 개이고 암술은 한 개인데, 수술 끝에는 보라색 꽃밥이 꽃가루를 품고 있다.

순비기나무는 7월에서 9월 사이에 뜨거운 햇빛을 안으로 삼켜 꽃을 피운다. 암술이 자라서 핵과가 되는데, 9월 이후에는 갈색으로 익는다.

일본과 중국, 동남아 등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자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부이남 지역 해안가에 주로 자란다. 줄기는 기어서 자리기 때문에 키가 작은 대신 한 그루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다.

‘순비기’라는 이름이 해녀의 ‘숨비소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해녀들이 해안가에서 오며가며 보는 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칠월의 제주 바닷가 숨비기꽃/ 숨비기꽃 피어나면/ 섬 계집들 사랑도/ 피어나리
작열한 햇빛 입에 물고/ 전복을 따랴, 미역을 따랴/ 천 길 물 속 물이랑을 넘는/ 저 숨비기꽃들의 숨비소리

-송수권 시인의 ‘숨비기꽃 사랑’ 1, 2연

▲ 순비기나무의 이름은 해녀의 '숨비소리'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사진=장태욱)

송수권 시인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쳤는데, 제주도 순비기꽃과 해녀를 소재로 시를 썼다. 시인은 뜨거운 태양 아래 보랏빛으로 피어난 꽃을 보면서, 천 길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를 떠올렸다. ‘순비기꽃’ 대신에 아예 ‘숨비기꽃’이라고 쓴걸 보면, 이 꽃에서 숨비질을 떠올린 서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순비기나무는 그냥 보기에 좋은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한방에서는 순비기나무가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열매를 만형자(蔓荊子)라 하며 해열, 진통, 소염의 목적으로 쓰이고 두통과 만성 중이염, 난청 등의 질환을 치료하는 약제로 쓰인다. 나무의 잎과 가지는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목욕 재료나 실내의 습기 제거 용도로 이용된다.

순비기나무의 다양한 쓰임에서 물질하고, 농사하고, 물 길어오고, 아이 키우고, 동네 일 돌아보고 했던 해녀들의 일인다역 분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지난겨울 이래 날마다 해풍과 짠물을 견뎌온 순비기나무가 제주도 해안에서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보라색 꽃을 뽐내고 있다. 멀리 바다에서 해녀삼춘이 내뱉는 숨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