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찾는 친구 엄마의 전화, 살아남으라는 시민군.. 운명을 바꾼 5월 광주

5.18민주유공자 부상자회 경창수 이사 초청강연회가 14일 서귀포시축협 명품관 회의실에서 열려

사라진 아들을 찾아달라는 친구 어머니의 전화 한 통화가 어린 소년을 5월 광주의 최전선에 서게 했다. 금남로가 피로 물들 때 시위대에 맨 앞에서 계엄군 철수를 주장했고, 도청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상무대에서 시신을 확인하는 활동을 펼쳤다. 도청이 함락된 이후 계엄군에 끌려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학대를 받았기에,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일은 청춘의 업이 되었다.


▲ 경창수 이사 초청 강연회가 14일 오후, 열렸다.(사진=장태욱)

5.18민주유공자 부상자회 경창수 이사 초청강연회가 14일 오후, 서귀포시축협 명품관 회의실에서 열렸다. 서귀포6월민주항쟁기념사업회(회장 이영일)가 주최한 행사다.

경창수 이사는 광주 동성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시절,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위대에 가담해 5월 27일 도청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도청을 사수했다.

청소년 경창수가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건 친구 지대위 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서 비롯됐다. “대위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찾아봐 달라.”라는 전화였다. 경창수는 5월 19일 친구를 찾으러 광주 시내로 나갔는데, 거기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했다. 수많은 시민이 공수부대가 휘두르는 총검과 곤봉을 맡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훗날 확인한 사실인데, 경창수의 친구 지대위는 5월 18일, 공수부대의 총검에 머리와 허벅지가 찔린 후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었다.


▲ 5.18민주유공자 부상자회 경창수 이사(사진=장태욱)

경창수의 집은 광주시 학운동에 있었는데, 학운동 삼거리에서 젊은 여성이 확성기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죽이고 있다. 싸워서 게엄군을 몰아내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상무대에서 가두방송을 하던 그 여성의 이름이 전옥주라는 걸 나중에 들어 알았다.

경창수는 5월 20일, 충장로에서 시위대에 합류했다. 공수부대의 총에 맞아 죽는 시민이 나왔지만 시민들은 밤새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진압을 뚫고 무등경기장을 향해 행진했다. 그리고 21일 동이 틀 무렵, 시위대는 광주역에 도착했고, 공수부대는 시민군에 밀려 도망갔다. 공수부대가 도망간 자리에는 살해된 시민의 시신 두 구가 있었다.

5월 21일 낮에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이 불과 10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그리고 계엄군 장갑차 총구에서 총알이 쏟아졌고, 수많은 시민이 쓰러졌다. 금남로는 피바다로 변했다. 그날 저녁 계엄군은 도청을 비우고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광주 외곽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을 봉쇄했다.


▲ 5월 21일, 시민과 계엄군이 금남로에서 대치하던 장면을 설명하는 장면(사진=장태욱)

“5월 20일과 21일은 광주항쟁에서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대부분 5월 27일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데 20일과 21일은 하루 24시간 동안 투쟁하고 승리한 날이에요. 공수부대가 도망가고 우리가 도청을 탈환한 겁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도청 앞 광장에서 수차례 궐기대회가 열렸고, 가두행진이 이어졌다. 경창수는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행진에 참여했다. 외국 사진작가 노먼 소포와 프랑슈아 로숑이 광주의 참상을 담은 사진에는 경창수가 시위에 참여한 장면이 선명하게 나온다.

5월 26일, 경창수는 상무관에서 시신을 확인하러 오는 시민을 안내하는 일을 했다. 상무관은 체육관이었는데, 시위 도중에 사망한 시민의 시신을 이송해 임시로 보관했다. 시민들은 시신이 도착하면 관에 넣어서 태극기를 덮어놓고 가족이 오면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계엄군의 정보원이 상무관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확인을 철저히 했다.

26일 밤, 시민군 지도부에서 “내일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실 분은 가고 남으실 분은 남으라.”라고 말했다. 경창수는 26일 밤에 결사항전의 마음으로 도청에 남았다. 그날 밤 총을 쏠 줄 모르는 시민 40여 명이 칼빈 소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 4시, 도청 건물 안쪽으로 총알이 쏟아졌다. 공중에서 도청으로 낙하한 공수부대가 건물 위쪽에서 내려오면서 총을 쏘는 것이었다. 경창수가 기어 도청 정문 수위실 앞까지 갔는데, 주변에 포탄이 터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포탄의 파편이 손에 박힌 것이었다. 총알이 빗발쳤고, 경창수는 뛰어서 도청 건물 2층으로 몸을 숨겼다.


▲ 부인과 함께 환영의 화분을 받았다.(사진=장태욱)

▲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사진=장태욱)

복도 쪽에서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준다.”라는 메가폰 소리가 들였다. 그때 시민군 아저씨 한 분이 “니가 제일 어리니까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이 사실을 세상에 증언하라.”라고 말했다. 그 아저씨의 권유를 듣고 경창수는 손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공수부대에 끌려나왔다.

수갑에 손이 묶인 채로 상무대로 끌려갔고 거기서도 정신없이 구타를 당했다. 상무대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는데, 38일 만에 가까스로 석방됐다. 집에 돌아와서 손가락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의사는 치료가 어렵다며 “그냥 살아라.”라고 했다. 지금도 파편이 박혔던 상처 때문에 악수를 세게 하면 손가락이 아프다.

이후 서울대학교에 진학해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노동운동에 헌신하며 보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은 의료복지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이사와 5.18민주유공자 부상자회 이사를 맡고 있다.

경창수 이사는 강연을 시작하면서 다큐멘터리 영상 한 편을 소개했다. 광주MBC가 5년 전에 제작한 ‘오월愛인연’ 제 2부, ‘경창수가 사는 이유’라는 작품이다. 5월 26일 도청에서 자신에게 너는 어리니까 살아 이 사실을 세상에 증언하라고 얘기했던 시민군을 찾는 내용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어른이 보여준 동지애, 그것이 경창수를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

경창수 이사는 지만원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관여했다고 주장하는 ‘만행’에 대해서도 분통을 터트렸다.

당시 경창수의 아버지(경훈 씨)는 아들이 상무관에 갇혀 있는 것도 모르고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5월 27일,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된 후 실종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상무관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 사진에 경창수의 아버지가 맨 앞에 나온다. 그런데 지만원은 당시 모인 사람들을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주장했고, 경창수의 아버지에게 ‘제 71광수’이자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태복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경창수는 지만원에게 “인간 쓰레기”라고 비난하며, “문제는 그런 주장을 강남 사람들이 믿는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는데, 통하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의 실존인물이 ‘문재학’라고 얘기했다. 경창수 이사는 “내가 5월 27일, 도청 정문으로 포복하고 있을 때 문재학이와 안종필이가 2층에서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재학과 안종필은 동성중학교를 같이 다녔고, 광주상고에 같이 입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도청 뒤 경찰국 건물 2층에서 둘이 같이 죽었는데, 노먼서프라는 월스트리트지 기자가 찍은 사진에 둘이 죽은 안타까운 모습이 담겼다.

“문재학은 소설의 내용처럼 죽은 친구의 곁을 지키려고 도청에 남았습니다. 어머니가 5월 26일 도청에 와서 아들에게 집에 가자고 했는데, 재학이는 ‘어떻게 친구를 두고 갈 수가 있냐. 시신이라고 거둬 줘야 한다.’라며 가지 않았어요. 우리가 원래 5월 27일에 시민장을 치르기로 했어요. 나도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하겠냐는 생각을 했다. 당시는 다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지난해 윤석열 일당이 저지른 12.3 내란에 대해서도 말문을 열였다. 올해 딸과 함께 윤석열 탄핵을 위해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며, “80년 5월 광주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하지 않고 형을 다 살게 했다면 12.3 내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윤석열 일당은 반드시 사면 없이 형을 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