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하시 좌판 옥돔 눈빛에 담긴 제주도의 하늘

[교토-오사카 여행기] ⑧ 오사카 쓰루하시 시장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을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공간이 있다. 쓰루하시시장인데, 일제강점기에 암시장으로 출발한 시장인데, 지금은 많은 여행객이 몰리는 명소가 됐다. 코리아타운 거리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갈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

파라, 냇둑공사 다 끝난 땅일지라도/ 40여 년 4·3땅은 다 끊긴 인연일지라도/ 내 가슴 화석에 박힌 사투리를 쩡쩡 파라
일본말 서울말보다/ 제주말이 더 잘 통하는/ 쓰루하시 저 할망들 어느 고을 태생일까/ 좌판에 옥돔의 눈빛 반쯤 상한 고향 하늘

-오승철의 ‘사고 싶은 노을’의 2, 3연

▲ 쓰루하시시장(장태욱)

고인이 된 시인이 오사카 쓰루하시를 방문하고 남긴 시다. 2009년 발표한 시집 ‘누구라 종일 홀리나’에 들어있다. 시인에게 누님이 계셨는데, 오사카 쓰루하시에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보다. 시인은 누님을 떠올리며 ‘제주로 못 가는 저 노을을 사고 싶다’라며 시를 맺는다.

쓰루하시는 그런 곳이다. 히라노강 둑 공사를 위해 수많은 조선인이 몰렸고, 조선인 마을을 형성했다. 그리고 조선인끼리 시장을 만들어 물건을 팔고 샀다. 해방 이후에 조선인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제주4·3을 거치며 많은 제주인이 쓰루하시로 돌아왔다. 쓰루하시는 조선촌이면서 제주촌이 됐다.


▲ 쓰루하시 시장의 과거와 현재(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에서 촬영)

쓰루하시에 공설시장이 들어선 건 1927년이다. 1920년대에 들어 일자리를 찾아 많은 조선인이 오사카로 들어왔다.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처음엔 상품을 들고 집집이 팔러 다니는 행상이 주를 이뤘는데, 점차 도로변에 자리를 깔고 장사를 했다.

조선인 노점상이 교통에 지장을 주고, 막걸리를 몰래 만들어 팔았다. 한때는 일경이 단속에 나서기도 했지만, 조선인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상황에서 단속을 심하게 할 수는 없었다,


▲ 쓰루하시 도매시장 입구(사진=장태욱)

▲ 시장 지붕 위로 전차가 지난다.(사진=장태욱)

1930년대 후반 이곳에는 잡화점, 생선가게, 정육점 등의 각종의 가게가 들어섰다. 노점상이 가게로 발전한 것이다. 1939년 5월 6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거기에서는 무당, 점쟁이도 있는가 하면, 약국, 빈대떡, 순대를 파는 곳이 있고, 공장, 의원, 포목(조선옷감)점 등이 있는 곳도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선인 부락 중 한 곳인 이카이노쵸를 한 바퀴 돌았는데, 시장이 열려 있고, 두부, 무, 배추, 삶은 순대, 콩나물 등도 조선옷을 입은 조선부인들이 팔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쓰루하시시장은 복잡해서 입구와 출구를 찾기도 어렵다. 제주시 동문시장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가게 대부분은 김치와 떡, 돼지수육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을 판다. 가게에서 주인과 손님이 대화하는 걸 들어보면 대부분 한국어다.


▲ 쓰루하시시장에 있는 떡가게(사진=장태욱)

그런데 지금의 가게 주인들은 오 시인이 얘기한 것처럼 제주어를 심하게 쓰지는 않는다. 주인장들 말을 들어보면 제주어보다 서울말에 가깝다. 찾는 손님 중에 여행객이 많아서 일부러 그런 말을 쓰는지, 서울에서 새로운 상인들이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코리아타운이 여행명소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일 게다.

과거 쓰루하시시장이 일본 당국의 단속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자랑거리가 되었다. 오사카시가 발표한 홍보자료에는 쓰루하시에 대해 전후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암시장’이 기원인데, 그 역사적 배경과 독특한 문화가 융합되어 현재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인기 명소가 되었다고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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