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문 상처를 열어젖히고 눈물로 세수하던 세월에 대한 기록

[신간] 한강의 『빛과 실』(문학과 지성사, 2025)


조개가 고통 속에 진주를 잉태하는 것처럼, 작가란 타인의 고통을 내안으로 끌어들이고 특이한 운명을 짐 진 자들이다. 독일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작가란 과거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족속’이라 했는데, 한강이 그 운명을 타고 난 작가라는 걸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한강의 신작 『빛과 실』(문학과 지성사, 2025)이 출간되었다. 문학과지성사가 발간한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의 아홉 번째 책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포함해 미발표 시와 산문, 그리고 작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일기 일부분이 함께 엮었다.

표제 「빛과 실」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이다. 작가가 1970년 생인데, 1979년과 80년 사이의 경험이 자의식에 깊이 영향을 줬다는 걸 알려 주는 대목이 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가족이 광주를 떠나기 전인 1979년에, 그러니까 여덟 살인 한강이 썼다는 시인데, 시에 담긴 단어 가운데 ‘금(金)실’은 지금의 자신과 연결된다고 고백한다.


한강의 신작 『빛과 실』이 출간됐다.

그리고 1980년 1월, 가족은 광주를 떠난 뒤 그해 5월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몇 해가 흐른 후 서가에서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읽었는데,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품게 됐다. 잔인함과 아름다움이 양립하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의문이다. 소설 『소년이 온다』는 5월 광주에서 죽은 자들을 현재로 불러들여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를 연결하는 소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전라도의 한 도시가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재현되는 보통명사다.(윤석열 일당이 내란을 일으킨 이후 한국사회가 보인 행태가 잘 증명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작가가 7년에 걸쳐 완성한 소설인데, 완성하기까지 겪었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에세이 「출간 후에」에 담겨있다.

울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 바람 부는 자정에 천변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산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 인간의 폭력성과 아름다움 사이의 간극, 한강 소설의 화두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의 여성들이 시민군에게 밥을 지어 제공하는 장면(사진=5.18기념재단)

『작별하지 않는다』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만한 루틴이 에세이 「작은 찻잔」에 소개됐다.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집 근처의 천변을 한 번 이상 걷기/ 찻주전자에 홍차 잎을 넣어 우린 다음 책상으로 가기 전에 한 잔 씩만 마시기

하천 주변을 산책하며 제주4·3의 무대가 되었던 공간의 현장성을 체득했을 것이고, 홍차 한 잔으로 무너지는 심신을 일으켰을 게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7년의 시간을 수도승보다 더 단순하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살았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에는 긴 세월 붙들고 살았던 찻잔을 스톡홀름 노벨박물관에 기증했다. 소개한 루틴은 박물관에 메모로 남겼다.


▲ 작가가 사용하던 찻잔인데, 스톡홀름 노벨박물관에 기증했다.
「북향 정원」과 「정원 일기」에는 자신이 사는 집과 정원을 소개했다. 작가의 소박하면서도 건강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열다섯 평 대지 위에 열 평 집을 3년 전에 샀다.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자기 명의의 집을 갖게 됐다. 그 집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다른 세계다. 집 북쪽 마당에 4평 정원을 꾸몄다. 라일락과 청단풍, 불두화, 옥잠, 맥문동이 정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원에 거울 8개를 설치해 빛을 식물로 향하게 반사시키며 식물의 반응을 관찰한다. 글쓰기 중간 쉴 때마다 반복하는 중요한 일과다. 4월 23일자 일기에는 ‘내가 벽을 향해 거울 빛을 쏘아주지 않자, 단풍나무가 스스로 마당 가운데를 향해 몸을 틀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독일 소설가 귄터 그라스(Günter Wilhelm Graß)는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란, 그 직업이 그런 것이지만 과거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들은 너무 빨리 아문 상처들을 열어젖히고, 입구를 봉해놓은 지하실에서 시체를 발굴해내고, 금지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금단의 음식을 먹어치웁니다.’

한강은 귄터 그라스가 말한 숙명을 그대로 짊어진 작가다. 권력이 가한 폭력, 그로 인해 생긴 상처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매일 현장을 다니고, 자료를 찾아 메모하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컵에 차를 마시고, 눈물로 세수하며 광대한 백지를 한 줄씩 채웠다. 그리고 인고와 고통의 시간을 지나 닫혀버린 동굴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빛을 끌어들였다.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이 작은 집과 작은 정원, 그리고 햇살에 빛나는 식물의 연둣빛 잎사귀라니, 참으로 슬픈 운명을 타고난 작가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