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사위에게 안부인사도 받지 못한 노인, 원주 글방에 남긴 채취

[강원도 기행] ① 원주 토지문화관과 박경리뮤지엄

오전 8시도 되지 않은 시각에 제주공항에 집결해야 된다니, 여행 첫날부터 잠을 포기하고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서귀포 사는 사람이 육지로 갈 때마다 겪는 고충인데, 아침 7시30분 공항 집결은 정말 괴롭다.

새벽 5시 무렵에 일어났을 게다. 그리고 차를 몰고 서귀포산업과학고 인근까지 가서 공항으로 가는 첫 번째 버스를 탔다. 제주시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버스는 만원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권을 받고 원주공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들고 온 에세이집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원주공항이다.


▲ 원주공항(사진=장태욱)

원주공항, 이번 여정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소다. 우리 비행기가 착륙할 무렵, 활주로에 비행기가 한 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이고, 건물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시골 골목 비슷한 길을 꼬불꼬불 지나는 사이, 바리게이트와 검문소 몇 군데를 지나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 대합실이 있는데, 공항 대합실이라기보다 소읍의 시외버스대합실보다도 작다.

20년 전 쯤에 청주공항에 처음 갔을 때 그 소박한 규모에 놀랐는데, 원주공항은 청주공항에 비해서도 무척 작다. 군사공항이어서 이용에 불편이 있고, 원주가 강원도에서도 인기 있는 여행지가 아니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원주에서 무슨 면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강원도 분위기를 풍기는 메밀국수와 만두, 수육으로 배를 채웠는데, 양이 많아서 다 먹지 못했다. 강원도의 음식이라는 게 감질난 맛이 없고 슴슴하고 소박한 게 특징이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토지문화관과 박경리뮤지엄이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그야말로 산골에 자리 잡았다. 모두가 박경리 작가를 기념하는 공간이고, 같은 재단에서 운영한다.


▲ 박경리뮤지엄(사진=장태욱)

박경리(1926~2008) 작가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로 유명한데, 독자들은 작가와 관련해 통영과 하동, 원주를 떠올린다. 경남 통영은 작가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고, 하동의 악양면 들녘은 『토지』의 배경이며, 원주는 작가가 『토지』를 완성한 도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박경리뮤지엄 언덕을 걸어가는데, 장을 담은 항아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토지문화관에 작가들에게 창작실을 빌려주는데, 이곳에 들어와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소설가 권여선은 에세이집『술꾼들의 모국어』에 토지문화관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남겼다.

‘나는 이 년이나 삼 년마다 토지문화관에 체류신청을 한다. 작가 한 명당 적당한 크기의 방 하나가 배정되는데, 욕실이 딸려 있고 침대와 책상과 작은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다.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두 달에서 석 달 사이고 취사는 금지되고 식사는 일정한 시간에 식당에 가서 급식을 하도록 되어 있다.’

권여선의 글에서 토지문화관이 수많은 작품의 산실이 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위미1리 작은도서관 홍은실 관장이 박경리 작가 동상에서(사진=장태욱)

뮤지엄 앞에는 박경리 작가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인자한 표정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작가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은 언덕 위에 자리 잡았는데, 그 앞에 소나무들이 운치를 더한다. 고즈넉한 시골 언덕에 자리 잡은 글방, 고요하고 아늑하여 작가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곳이라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소설『토지』의 작가로도 유명한데, 시인 김지하의 장모로도 잘 알려졌다. 작가를 원주로 이끈 것은 김지하에게 시집간 딸이 원주에 살았기 때문이다. 70년대까지 시인 김지하는 글로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했고, 다섯 차례나 감옥을 다녀왔다. 그가 고초를 겪는 동안 가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지하는 1973년 4월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는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됐다.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가족 접견, 책 반입, 운동과 세면까지 금지됐다. 외국 문인과 지식인의 구명운동이 이어져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소설가 김훈은 당시 신문사 기자였는데, 1975년 2월 15일 김지하가 출소하는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영등포교도서에 나갔다. 그때 김지하를 환영하기 위해 모여든 군중과 떨어진 곳에서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박경리 작가였다. 박경리는 사위의 출소를 앞두고 생후 10개월도 안 된 손자를 업고 영하 12도 강추위 속에 교도소 앞에 나와 있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남긴 김지하 시인 관련 기록

김훈은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당시 상황을 담은 글을 남겼다.

‘그 여인네는 교도소 정문 안에서 들끓는 그 어떤 사람과도 무관해 보였다. …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 김지하가 무동을 타고 아우성을 치며 광장을 휩쓰는 동안에도 그 여인네는 어둠 속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여인네는 다만 바라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출감한 옥문 앞에서 장모를 만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의 안부를 물을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김지하는 무동을 타고 기세를 올린 후 그의 지지자·찬양자 무리가 미리 준비해놓은 승용차에 올라타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지하는 개인 김지하가 아니었고, 시대의 것이며 시대가 지운 짐을 짊어진 오로지 투사였다. 핏덩이 같은 아들, 불우한 가정을 돌보는 따위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김지하가 내버려둔 가족을 돌보는 일은 장모 박경리의 몫이 됐다.

김지하는 감옥에서 풀려났으나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같은 해 3월 다시 구속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고 다시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고,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박경리 작가가 1980년, 원주에 있는 딸과 손자들을 들보기 위해 서울을 떠나 원주에 정착했다. 작가는 1990년대 중반까지 원주시 단구동에 살았는데, 집은 택지 개발구역에 포함됐다. 소설 『토지』를 완성한 집필현장이 사라질 처지에 놓이자, 시민과 전국의 문인들이 작가의 집을 살리는 운동에 나섰다.

한국토지공사는 시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작가의 집을 보존했다. 단구동 집터에는 토지 ‘문학공원’이 설립됐다.


▲ 박경리 작가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인데, 지금은 제 2전시실로 사용된다. 작가의 취향과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다.(사진=장태욱)

작가는 1998년, 매지리에 집을 짓고 집필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인근에 대회의실, 세미나실, 집필실, 식당, 연구실, 야외무대 등을 갖춘 토지문화관이 들어섰다. 한국토지공사와 현대건설 등이 비용을 보탰다.

2021년에는 작가의 마지막 집을 포함해 전시공간이 마련됐는데 ‘박경리뮤지엄’이다. 제 1전시실은 작가의 인생을 보여주고, 제 2전시실은 작가가 마지막에 살았던 집을 보여준다. 제 3전시실은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는데, 생전 남긴 육필 원고를 볼 수 있다.


▲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박경리 작가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찍은 사진

전시실마다 볼만한 것들이 있는데, 작가가 살았던 2전시실은 작가의 생활양식과 취향을 잘 보여준다. 컵을 많이 모아둔 것과 담배를 피우던 재떨이, 방에서 고추를 널어 말리기도 했다는 평상 등에서 유명 작가보다 고민 많은 소박한 노인의 모습이 읽힌다. 박완서, 천경자 등 동료 문학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박경리 작가의 외손자이자 김지하의 차남인 김세희 씨가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화관장을 맡고 있다.


** 새마을문고 서귀포시지부가 기획한 '길 위의 인문학 투어'에 참가했습니다. 행사를 마련해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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