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불지옥 제주섬을 떠난 일가족의 처절한 몸부림
[북 리뷰] 박사라 저·김원경 역『가족의 역사를 씁니다』(원더박스, 2023)
가족사는 한 가족 구성원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특정 시대와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다. 그 시대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사는 한 시대의 사회상과 문화를 담은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개인의 작은 이야기가 모여 가족사가 되고 가족사는 사회 전체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저자의 할아버지 방희방은 조천면 신촌리 출신으로, 배우자 김영홍과 슬하에 11남매를 낳았디. 일제강점기인 1942년 가족을 이끌고 일본 오사카부 후세시에 정착해 살다가 1984년 무렵에 사망했다. 박희방의 자녀 11명 가운데 10명이 살아 있는데, 대부분 오사카에 살고 있다. 10남매의 배우자와 자녀를 모두 모이면 대가족이라 부를 만하다.
저자는 박희방의 육남이자 막내인 박현규의 딸이다. 사회학자가 된 이후 1945년 이후 한반도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고 제주도의 많은 것이 일본과 관련이 있다는 걸 이해했다. 특히, 1948년 발생한 제주4·3이 자기 가족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족의 역사를 쓸 결심을 했다.
책은 가족 가운데 고모 두 명(박정희, 박준자), 숙부 한 명(박성규), 고모부 한 명(이연규)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이들이 왜 일본으로 왔으며, 어떻게 왔으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질문하고 답을 듣는다. 그 가운데 이연규와 박성규의 인생사만 요약했다.
■ 박성규
1938년 조촌면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그해 일가족이 일본으로 이사했기에, 후세에서 성장해 소학교에 입학했다. 소학교 다닐 때 미국 폭격기를 피해 방공호로 숨었던 기억이 있다. 해방 직전에 둘째 형 박인규가 남의 돈을 훔쳐 가족은 경찰에 쫒기는 신세가 됐다. 마침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고전할 때라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가족은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탔다. 배가 태풍을 만나 구조되어 야마구치로 이송됐는데, 거기서 며칠 지내다가 부산행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제주4·3 때 소학교 교장 관사 마당에서 경찰이 주민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몰래 엿본 기억이 있다. 또, 군인들이 주민들을 학교 뒤편 밭에 집결시킨 날을 기억한다. 박성규는 당시 군인이 주민을 죽였다고 기억하나, 실제로는 마을 유력자들과 경찰이 중재해 유혈사태 없이 마무리됐다.
당시 아버지 박희방과 큰형 박제규는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박제규는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사관과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박제규는 어려서 일본으로 간 후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기에, 제주도 방언과 오사카 방언 밖에 할 수 없었다. 박제규는 경찰에 의해 제주시내에 수감됐는데, 어머니 김영홍이 아기를 업고 제주시까지 8킬로미터를 걸어서 왕복하며 장남을 구명하려고 나섰다. 박제규는 석방이 되었는데, 너무 많이 얻어맞아서 가족은 장남을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948년 11월 11일, 무장대가 조천리를 공격했는데, 불똥이 신촌리에 튀었다. 군인들은 주민 몇 명을 붙잡아 경사진 밭에 세우고 김일성 만세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죽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박성규는 어린 나이에 구멍 틈으로 그걸 목격했는데,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여서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무장대가 마을에 쳐들어와 학교를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 누구가 연설을 하면서 마을에 남으면 모두 죽을 테니 산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박성규는 그 사람 말을 듣고 어린 나이에 산으로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산으로 갔는데 잘 데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다. 일행 중에 죽더라도 마을로 내려가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마을로 돌아왔다. 부모는 아들이 죽은 줄 알았고, 아들은 부모님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서로 만나서 함께 통곡했다.
1949년 1월 무렵 제주도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가족은 여자들을 제외하고 아버지 박희방이 가진 어선에 몸을 싣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도 배에 탔는데, 짐칸이 사람들로 빽빽했다. 당시는 치안이 확립되지 않아 일본 밀항이 쉬웠다고 했다. 오사카에는 돈을 받고 밀항을 도와주는 꾼이 많았다. 게중에는 밀항꾼에게 속아서 돈만 날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41년 4월, 소사카 시립 서금리 중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에서는 독특하게 공립학교이면서 일본인·조선인 교사들이 함께 교육을 담당했다. 박성규는 서금리 중학교 1기로 입학했는데, 2학년 때는 스이타사건(오사카 스이타시와 도오나카시에서 일어난 반전 평화 시위)에 참가했다.
남자들이 오사카에 정착한 후 남은 가족이 순서대로 일본에 왔다. 그런데 가족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 박희방과 차남 박인규가 도박에 빠지면서 가족의 삶은 비참해졌다. 부모는 서로 싸우고 형제사이에도 주먹이 오갔다.
박인규는 도쿄 도립 조선인학교에 입학했지만 돈이 없어 1년 만에 중퇴했다. 오사카로 돌아와 나사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는 철강 관련한 일이 대단히 바빴다. 박인균는 “아마도 첫 번째 원인이 조선동란(한국전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본 공업은 현저히 부흥했다. 특히, 철강과 기계 분야는 생산이 급증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용은 크게 늘었다. 1953년 일본의 철공업 생산은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박인규는 이후 다른 친구들과 함께 산업폐기물 처리공장을 차려 자리를 잡았다. 동생과 조카들을 공장에 고용했고, 막냇동생을 보살피며 대학에 보냈다. 셋째 아들이었지만 장냄 대신에 제사를 물려받았고, 제주도 친척들과 교로를 거르지 않는다.
박성규는 제주도에서 소학교 다니던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소학교 다닐 때 한국어를 잘 못한다고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는데, 지금 고향에서 만나면 그리 반가울 수 없다고 한다.
■ 이연규
박정희의 남편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하고 소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제주도를 떠나 중학교를 졸업했고, 1942년 제주도로 돌아와 한림면 귀덕소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는데, 기분이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 교장은 학교에 가만히 앉아있었고 조선인 교사들은 앞으로 학교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 지 의논했다.
일본인이 물러가고 공산주의 조직활동에 참여했다. 1946년 남로동이 결성되자 거기에 가입해 활동했다.
3.1절 발포사건과 단독선거 반대 총파업이 일어났고,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에 응원경찰을 파견하고 주모자를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이연도 그때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징역 8월 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출소하고 보니 제주도는 남로당 세상이었다. 남로당 지도부는 한라산에 들어가서 끝까지 투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동료들이 같이 산에 올라가자고 권했지만, 거부하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얼마 없어 제주도는 불지옥으로 변했으니 이연규로서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일본에 넘어올 땐 가방도 없이 고작 50엔만 들고 왔다. 밀항선을 타고 보니 선실 안에 사람이 가득 있었다. 배는 파도를 맞으며 며칠을 항해한 끝에 구마모토의 작은 항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아는 사람을 찾아 꾸역꾸역 오이타로 갔고, 지인의 도움으로 오사카에 왔다.
잠시 민족학교 교사로 생활했고, 이후에 보수를 받고 쌀을 운반해 암시장에 파는 일을 했다. 도중에 붙잡혀서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재판장에서 ‘내가 조선에서 소학교 교사였는데, 아이들에게 일본인이 되라고 가르쳤기에 조선에 살 수 없어서 일본에 왔다.’고 진술해 판사가 풀어줬다고 한다.
고향에는 어머니와 남동생 둘이 있었다. 남동생 한 명은 서울로 몸을 숨겼는데, 전쟁 통에 북으로 갔는지 연락이 끊겼다. 막내 동생은 형을 폭도로 몰려 거제도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
쌀 나르는 일을 그만두고 오사카 지인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이후 그 집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도 일했는데, 그때 박정희를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1978년에 고향을 방문했는데, 가족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근대를 일본을 통해서 제주도에 들어왔다. 제조도 역사에서 일본과 재일제주인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지금 제주도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재일제주인이 미친 영향, 이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가치는 특별하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재일제주인의 삶에 대해 여러 자료를 발표했지만, 개인사를 이토록 깊숙이 보여주는 건 없었다.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 일가족이 제주도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 일본에 숨어서 정착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보여주기에 책은 독자를 전율하게 한다.
특히, 저자가 단순히 가족을 인터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과 제주도에서 직접 자료를 조사해 기억의 여백을 채웠다. 독자의 이해를 돕는 수고가 돋보인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책이 개인들의 생애사 구술에 그치지 않고 학문적 자료가 된다.
그동안 저자가 조사한 자료의 목록을 열 페이지에 거쳐 빼곡하게 소개했고, 연표를 만들어 가족과 제주도, 한반도, 동북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연도별로 기록했다. 생애사 아카이브를 하는 과정에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다. 저자를 포함해 책에 등장하는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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