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계단 오를 땐 몰랐다, 야생의 것들이 이리 행복한 줄

[주말엔 꽃] 물영아리오름 여름을 밝히는 것들

12일 오전, 일행과 함께 물영아리오름에 올랐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지속되더니 오전에 이슬비가 조금 내렸다.

물영아리오름의 백미는 람사르습지에 지정될 만큼 건강한 생태계를 자랑하는  산정호수다. 그런데 오름은 분화구를 볼 수 있도록 길을 쉽게 열어주지 않는다. 800개를 넘는 나무 계단을 올라야 분화구 능선에 오른다. 그리고 능선에서 산정호수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닿을 수 있다.

계단을 오르는데 몸에서 열이 나서 비옷은 벗어 뭉쳐 허리에 메었다. 도중에 계단 쉼터에서 두 번 쉬고서 겨우 분화구에 닿았다. 그런데 오랜 가뭄에 산정호수는 모두 말라버렸고, 짙은 안개로 보물 같은 습지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실망하고 왔던 계단길을 다시 내려가는데, 몸은 오를 때보다 훨씬 가벼워지고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란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꽃댕강나무가 하얀 꽃을 마음껏 펼쳤는데, 가지 사이로 거미가 그물을 치고 모처럼 내리는 비를 만끽하고 있었다. 눌러앉은 거미를 보면서 여름이 야생의 계절임을 실감했다.

무덤가에 엉겅퀴가 보랏빛을 발한다. 무덤 주변은 온갖 풀이 무성한데, 엉겅퀴는 꽃이 돋보이게 줄기를 우뚝 끌어올렸다. 여름 더위로 수국은 마르기 시작했는데, 여기 산수국은 빗물을 머금고 푸름을 뽐냈다.

그리고 예덕나무, 옅은 노란색 꽃을 길게 늘어뜨려 여름 야생의 기운을 과시한다. 색깔로는 돋보이지 않는 게 서운했는지, 꽃대를 길쭉하게 늘어뜨렸다. 꽃 끝에 달린 솜털마다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오전에 잠시 내린 이슬비지만 이걸로 살아있는 야생의 모든 것들은 행복하다. 이것들이 있어 나도 행복하다.


▲ 꽃댕강나무 사이에 거미가 그물을 쳤다.(사진=장태욱)

▲ 엉겅퀴가 주변 잡풀 사이로 꽃을 들어올렸다.(사진=장태욱)

▲ 산수국은 색깔 자체가 푸른 여름이다.(사진=장태욱)

▲ 예덕나무가 길쭉한 꽃대를 늘어뜨렸다.(사진=장태욱)

▲ 물영아리 산정호수. 안개가 끼어 멀리 보지 못했는데, 가뭄에 바닥이 말라 물이 보이지 않았다.(사진=장태욱)

▲ 때죽나무 열매(사진=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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