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읍 위미리 감낭굴화전은 화전 인근 묘비 문구에서 ‘시목동(柿木洞)’이란 이름으로 확인된다. 위미리 4576~4587번지 사이가 감낭굴 화전에 들어가며, 감낭굴에서 떨어진 이생이오름(이승악) 인근 위미리 4589, 4590번지에 화전 집터도 있다. 그런데 위미리 45
궤영곶은 그 뜻이 분명하지 않으나 ‘궤엉곶’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인근 하천 ‘홋긋내’, 즉 한남리 물오름 서쪽에서 다래오름(거린악, 큰거린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 북쪽으로 흘러드는 하천에 궤와 엉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곶 지역에 거주했던 화전민은 3∼
제주4·3은 화전마을을 포함해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국방부는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1월 23일에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다. 이 시기부터 이듬해 봄 3월에 이르는
굴치화전은 수망리 민오름의 서남쪽 1635-3번지에 있던 화전 터다. ‘머체왓숲길’ 동쪽 내 넘어 한남리‧남원리 공동목장에 속하는 ‘막지슨동산’, ‘밤낭밭’에 오르면 과거 오봉진이란 사람이 소유했던 땅이 있다. 오봉진의 아들 오면하는 1930년대 마을공동목장에 자신의
앞선 기사에서 월평마을이 행정소송 끝에 어촌계를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어촌계는 있지만, 어촌계에는 어업면허가 없다. 월평마을 해안에 대한 어업면허가 강정동어촌계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월평마을 주민들이 뼈아프게 여기는 대목이다.월평어촌계가 10년 전에 처음 설립
<전편에 이어> 구슬에 따르면 머체왓에는 김 씨들도 많이 살았는데,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집안이었다. 남원리 안〇〇(1935생)은 남편 김〇호(1937생)의 부친이 머체왓화전에 살았으며 김〇호와 누나 김〇일, 여동생 김〇열이 머체왓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남원읍 한남리는 제1횡단도로 변 물오름(동수악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과 궤펭이오름(주차장 옆)을 경계로 남동 방향으로 이어진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로 소낭당내(松木堂川:서중천로 불리는 내)가 흐르는데, 이 내(川)의 동쪽과 서쪽으로 상잣 위 중산간 목장지대에 목장화전이
시인 곽재구는 「포구기행」(열린원, 2002)에서 제주도 해안도로에 접한 여러 마을 가운데 특별히 월평동과 강정동을 좋아한다고 했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검은 돌담길에 들어서면 잠시 길을 잃기 마련인데, 그게 여행자에겐 최고의 행운이라고 했다.그런데 곽 시인이 그토록 극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과 따비튼물화전과 구진다라이화전 등에 대해 기술했다. 장구못화전에는 이재수의 난 때 화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인 가족도 있었고, 구진다라이오름엔 4.3 때 집이 불타고 목숨이 위험에 놓이자 조상 묘 주변에 굴을 파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화전민
27일 오후, 하례1리 마당에서 장작이 타오르고 가마솥이 김을 내며 끓었다. 가마솥에서 갓 삶아낸 돼지고기 수육과 옛날식 피순대가 도감의 손을 거쳐 접시에 오르는데, 이런 풍경을 처음 보는 손님들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서로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음식상을 받은 사람들
백하르방이 전한 별씨인 귤꽃이 봄비를 잔뜩 머금고 참았던 웃음보따리를 풀었다. 꽃향기가 사방천지에 진동하니, 긴 내창에 배를 깔고 깊은 잠에 빠졌던 용이 비늘을 꿈틀대며 잠에서 깬다. 백하르방의 별씨 선물을 반겨 온 마을 주민들이 함께 춤을 추고 성대하게 잔치를 열 시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에 살았던 양씨 집안, 고 씨 집안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제주4.3 당시 화전민들은 토벌대에 피살되고 가옥은 무장대의 식량보관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 씨 집안은 천주교인 가족이 있었는데, 이재수의 난 때 화를 피해 장구못화전에
<앞선 기사에 이어> 앞선 기사에서 수망리 장구못화전에 살았던 양씨 집안, 고씨 집안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제주4.3 당시 화전민들은 토벌대에 피살되고 가옥은 무장대의 식량보관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망리 현경생(1929생)은 일제강점기에 부친이
수망리에는 목장화전과 곶화전, 고잡(고지앞)화전 등 세 종류의 화전이 모두 있었다. 국림담의 위쪽 숲을 ‘치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국림담 아래 ‘진구술’ 목장의 풍력단지 외에는 대부분 나무가 자라 자왈과 곶으로 변하고 있다. 목장화전 지역으로는 수망리 1027~1
‘거슨내’ 주변에 몰도왓 돌방아가 있었다고 하는데, 본격적인 마을 형성을 위한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김〇차(1932생)의 구술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마을에 회의가 있을 때면 물도왓 사람들이 신흥 2리로 와서 마을 회의에 참여했고, 해방 전에는 물도왓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