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들을 찾아달라는 친구 어머니의 전화 한 통화가 어린 소년을 5월 광주의 최전선에 서게 했다. 금남로가 피로 물들 때 시위대에 맨 앞에서 계엄군 철수를 주장했고, 도청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상무대에서 시신을 확인하는 활동을 펼쳤다. 도청이 함락된 이후 계엄군에 끌
제주도는 예로부터 바다를 일터 삼아 생활을 영위했다. 그런데 1883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재조선국 일본어민통상장정’을 제주 어민의 생활은 큰 위기를 맞았다. 협정을 근거로 일본 어민은 조선의 근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무분별한 어업 침탈로 제
남원읍 위미리에서 독립서점 북타임을 운영하는 임기수 대표는 최근 걱정이 많아졌습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서점 매출이 조금씩 떨어지는 점입니다. 유튜브와 SNS, OTT 등 새로운 미디어들이 등장하면서 책을 읽는 인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최근 경기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관장 박찬식) 광장에는 제주도 현무암바위가 여러 기 전시됐습니다. 바위의 크기가 거대하기도 하고 모양도 뾰족한 것이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의 기를 압도할 만한 것들입니다.이 바위가 여기로 오게 된 경위도 흥미롭습니다. 4대 김인탁 관장의 증언이 영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관장 박찬식)이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시를 마련했습니다. 5월 24일부터 11월 3일까지 박물관 특별전시실에 열리는 ‘기억과 기록을 잇다’ 전시입니다. 지난 1984년 5월 24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이 개장한 지 40년을 맞아 마련한 전시입니
1980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7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도시인 서귀포에도 해마다 6월 항쟁을 기념하는 시민 모임이 있다. 1980년 6월에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하는 등 항쟁에 동참했던 시민들이다. 당시 청년들은 ‘서귀포 6월 민주항쟁
남영호는 1970년 12월 15일 1시 25분경 전남 여수시 남면 연도(당시 주소로는 전남 여천군 남면 소리도) 남남동쪽 25km(13.7마일) 지점에서 파도에 부딪쳐 복원력을 잃고 침몰했다.사고 후 12월 26일 법무부장관 배영호가 국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남영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다. 성산포항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화물은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는데도, 성산포항에서 화물과 승객을 더 실었다. 사고가 뻔히 예견되는 상황인데도 사무장 강O근의 위세에 눌려 선장은
앞선 기사에서 남영호 선장 강ㅇ수가 1970년 12월 14일, 서귀포항에서 배에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하도록 실은 선원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배가 그날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도 승객과 화물을 더 실었다. 바닷물이 갑판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승객과 선원 210여 명을 태우고 서귀포항을 출항했다. 앞선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승객 30여 명은 승선 신고도 되지 않은 채였다. 배는 화물창은 물론이고 객실과 갑판까지 짐을 가득 싣고 있었다.그리고 저녁 7시25분에 기항지인 성산
남영호는 1970년 12월 9일 부산항을 출항해 서귀포항에 도착한 후 10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남해안에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4일간 서귀포에 체류하고 바다가 잠잠해지고 난 후에서 운항을 이어갈 수 있었다.그리고 그해 14일 오후 5시, 서귀포항을 출항했다
해방 이후 제주도와 외부를 연결하는 뱃길을 1960년대까지 끊겨 있었다. 이후 박정희가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제주도 하늘길과 뱃길이 열렸다. 기선 덕남호(총톤수 280.3톤, 정원 289명)가 1963년 1월 4일 제주항에서 취항해 제주-목포 구간 운항을
▲ 남영호 참사 53주기를 맞는다. 남영호 참사는 그동안 망각을 강요받았는데, (사)기록과 기억은 앞으로 기억의 파편을 모으는 긴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서귀포의 12월, 남영호 참사의 기억이 뇌리에 되살아나는 계절이다. 53년 전, 300명이 넘은 무고한 생명은 차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