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문복 선생과의 인연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

소농 오문복 선생에 대한 기억 - ①

인연(因緣)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의 인연이라 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 를 인연이라 한다. 소농 오문복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져 오늘일까.

특히 비학비천(非學卑賤)한 내가 소농 선생님과의 인연은 칠순의 나이를 먹은 지금도 대단한 행운이다. 선생님은 내게 일생의 멘토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 소농 오문복 선생과 필자(사진=장태욱)

소농 오문복 선생(이하 소농 선생)을 안 지는 꽤 오래됐다. 필자가 젊은 시절(80년대 초)에 성산읍 고성리 성산면사무소 앞에서 농자재 유통사업을 할 때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40년이 넘은 듯하다. 아마 그 당시 소농 선생은 40초 중반으로 서귀포 소암 현중화 선생으로 부터 서예를 배우고 있었으며, 한편으론 '관광제주'란 월간지를 발간하여 그 대표를 맡고 있었다. 지금도 잡지 발행이 쉽지 않지만 그 당시 잡지 발행은 물적으로 심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그런 저런 연유로 인하여 소농 선생과 가까워 진듯하다.

‘소농 오문복 평설'을 쓰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소농 선생 평설을 쓸 준비가 전혀 없을 뿐더러 그 실력 또한 갖추지 못함을 한탄하면서도 나름대로 그간 소농 선생과 나 사이 지나온 소소한 이야기들과 에피소드 또는 단편(短篇)적인 사항들을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쓸까 한다.


▲ 참칭정(사진=장태욱)

■ 창침정(窓枕亭) 건립하다

2011년 10월 29일 신풍리 천미천 변 작은 언덕에 창침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이는 단순한 정자가 아닌 스토리가 있는 정자를 세워 잔잔한 감동을 주웠다. 성산읍(당시 읍장 고주영) 주관 하에 故 윤춘광 제주도의원의 재량 사업비 기천 만원을 투입하여 한옥 형태로 그럴듯하게 세워 성대한 건립 현판식을 가졌다. 그 당시 제주도내 각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 내용을 서술하여 창침정 정자의 의의를 밝히려 한다.


▲ 참칭정 현판(사진=장태욱)

'성산읍 신풍리 천미천 냇가에 한옥 형태의 창침정(窓枕亭)이란 정자가 세워졌다. 이 정자가 있었던 곳은, 옛 부터 신풍마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인 삼달·난산·가시·토산의 문인들이 모여 송포희(送泡戱)를 하기도 하며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향토사학자 소농 오문복 선생은 "시회가 시작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광무(光武) 연간으로 추측되며 시회의 명칭은 화천시사(花川詩社)였으며 왜정시대를 거처 광복 이후까지 유지되였다" 고 말한다. 이처럼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에 정자를 세운 뜻은. 물질만을 앞세우고 정신을 뒤로 미루는 시대 풍조를 바로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첫 걸음으로 이 내(川)를 시로 읊은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 신풍 출신 조선시대 유학자) 선생의 원필을 찾아 묵적비(墨跡碑)를 세운 곳에 정자를 지어 그 의미가 남다르며 정자의 이름을 '창문이 베개가 되는 정자 창침정(窓枕亭)이라 한 것은 묵적비(원시)의 제목 '창 앞에는 흐르는 물, 베개 옆에는 책(窓前流水沈邊書)'에서 첫 글자를 뽑은 것으로 '창문을 베고 물소리 들으며 보이지 않은 정신세계를 더듬는다' 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오묘한 뜻이 있는 창침정 건립과 현판식 전 과정을 성산포문학회 주관으로 가져 뿌듯한 마음이다. 이는 소농 선생의 향토관과 역사관을 아우르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필자 또한 이 일에 깊게 관여하여 문화적 바탕을 우리 지역에 미력이나마 남기는 데 일조를 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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