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물, 고목그늘 아래 선들바람.. 무더운 날도 향기롭다

고려가요 ‘도근천요’의 고향 ‘월대’

더위가 늦게까지 기승을 부린다. 간혹 소나기가 내려서 열기를 식혀주는 일도 있는데, 요즘 소나기는 동네를 가린다. 제주시 외도동, 아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올해 외도동에는 비가 귀하다. 인근 애월읍의 다른 마을과도 날씨가 다르다.

이렇게 더운 날이 계속될 때, 외도동 주민들이 찾는 곳이 있다. 외도천이 바다에 미처 당도하지 못한 지점에 월대라는 쉼터가 있다. 이곳에 오래된 팽나무와 해송이 그늘을 만들어주는데, 오래전 사람들은 거기에 누대를 만들어 풍류와 피서를 즐겼다.


▲ '월대'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과 누대(사진=장태욱)

월대가 있는 곳은 한라산 북쪽 사면에서 발원한 세 개의 하천이 만나 바다에 이르는 지점이다. 한라산 어리목 계곡 인근에서 도근천, 어시천, 광령천이 각각 발원해 사면(斜面)을 타고 바다를 향해 흐르다 월대에 이르기 전에 서로 합쳐진다.

이 세 개 하천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대부분 구간이 바닥을 드러내는 건천이다. 그런데 월대에 이르기 전에 땅속 여러 곳에서 물이 솟는다. 고냉이소, 나라소, 진소, 검은소 등 샘이 솟아 물이 고이는 연못이 많고, 고망물, 절물, 통물 등에서 물이 솟아 하천으로 흐른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전분공장이 세워졌는데, 공장은 절물에서 나는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월대 주변에서 나는 물을 상수원으로 하는 취수장이 건립됐다. 하루 2만톤의 물을 취수해 제주시 거의 대부분 지역에 물을 공급할 때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강수량도 일정하지 않아 취수량이 크게 줄었다.


▲ 오래된 나무들 아래로 사계절 물이 흐른다.(사진=장태욱)

이 주변의 물에 관한 내용은 고려의 문헌에도 등장한다. 고려말 문인 이제현(李齊賢)이 정리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도근천요(都近川謠)’라는 노래가사가 등장한다.

도근천 제방이 터져(都近川頹制水坊)
수정사 안에 물이 출렁이네.(水精寺裏亦滄浪)
승방에다 이 밤에 미인을 재우니(上房此夜藏仙子)
주지는 도리어 뱃사공이 되었네(社主還爲黃帽郎)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는 이제현이 고려 속요와 제주도 민요를 칠언 절구의 한시로 번안해 정리한 것으로 총 11수의 작품이 들어있다. 도근천요는 그중 하나인데, 여색을 탐하는 중이 홍수에 물이 넘쳐 물속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고려 말 사회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노래다.


▲ 다리 건너에 바다가 있다.(사진=장태욱)

고려시대 월대 가까운 곳에 수정사가 있었다. 원당사, 법화사와 더불어 제주 3대 사찰로 불릴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태종실록』에 ‘수정사의 노비를 130명에서 30명으로 줄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개국 이전에는 큰 사찰이었다.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충청도 금산을 거쳐 제주에 유배되었던 충암 김정은 불자인 고근손의 요청에 의해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靜寺重修勸文)을 지어주었다. 중수권문은 1521년 충암 김정이 사약을 먹고 사사되기 직전에 쓴 것이니, 수정사가 16세기까지는 남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돌다리가 있어 걸어서 하천을 건널 수 있고, 아이들이 물에 휩쓸리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사진=장태욱)

▲ 개도  피서를 하고 있다.(사진=장태욱)

평일인데도 월대에는 어린이를 포함한 일가족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한 어린이는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하루 체험학습을 신청해 물놀이를 나왔다.”라고 말했다.

하천 주변에는 물을 건널 수 있도록 돌다리가 만들어졌다. 오래 전에는 없던 것인데, 이것 때문에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가 줄어들 것 같았다. 아내는 “어릴 때 갑자기 하천에 물이 불어서 바다로 휩쓸린 기억이 있는데, 다리가 있어서 훨씬 안전하게 보인다.”라고 말했다. 밀물이 되자 돌다리 틈으로 바닷물이 하천을 거슬러 흐르는 게 보였다.

늙은 팽나무 아래 있으니 하천을 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 도심의 더위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자, 자리를 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은어들이 물속에서 떼를 지어 놀고, 250년 된 해송, 500년 된 팽나무가 운치를 풍기는 곳, 제주시는 월대가 있어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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